어느 이스파한 아저씨의 한국인과 함께한 40년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은 독일에 사시는 한 Isfahan(이스파한) 출신 아저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이분은 독일에서 약 40년 동안 살아오시면서, 그 긴 세월 동안 한인 사회와 참 깊은 인연을 맺고 이웃으로 함께해 오셨습니다.
그냥 단순한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4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국 분들과 자주 만나고 깊이 교류하다 보니, 본인 말씀으로는 한인 사회 안에서 정겨운 ‘개구쟁이 이방인’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하시네요.
얼마나 신뢰를 얻었는지, 많은 한국 분들이 가족 이야기, 개인적인 고민, 갈등, 교회 이야기, 이민 생활, 심지어 한인 사회 내부의 소소한 다툼까지도 이분에게 편하게 털어놓으시곤 합니다. 베를린 주재 한국 대사님이나 뒤셀도르프 총영사님도 한인 행사나 축제 자리에서 자주 뵜다고 해요.
본인 표현을 빌리자면, 독일 한인 사회에서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가 되신 셈이죠. 한국인도 아니고 독일인도 아닌, 이스파한 출신의 한 사람이 40년 동안 그 중심에 서서 모든 것을 가까이서 지켜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분은 40년 동안 한국 분들과 함께하며 무엇을 배우고, 또 자신의 문화와 어떤 차이점을 느끼셨을까요?
옛 한국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 남은 이란:
이분이 가장 흥미롭게 느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한국의 어르신들이 기억하는 이란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여든이나 아흔쯤 되신 한국의 어르신들과 이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가 요즘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됩니다.
20세기 중반, 한국의 옛 세대에게 이란은 아시아에서 아주 강하고 현대적이며 발전된 국가였습니다. 걸프 지역의 아랍 국가들이 아직 현대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던 시절, 이란은 발전의 중심지였습니다.
지나간 세기 중반, 이란은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중요한 신흥 공업국이었습니다. 석유가 풍부했고 산업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지역 내에서도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죠. 심지어 많은 한국 분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란으로 일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음식 문화와 생활의 차이:
지리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은 면적이 약 10만 제곱킬로미터 정도로, 이란의 이스파한주와 비슷한 크기입니다. 너비로 치면 이스파한에서 돌리잔까지, 길이로 치면 이스파한에서 테헤란까지의 거리와 비슷하죠.
한국은 산이 많고 국토가 집약적이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많지 않았습니다. 밀밭도, 소나 양을 키울 넓은 초지도 부족했죠. 그래서 키울 수 있는 동물은 주로 닭이었습니다.
주식은 벼농사를 통해 얻는 쌀이었고, 1년에 여러 번 수확하곤 했습니다. 당연히 밀이 없으니 빵 문화도 발전하기 어려웠죠. 하지만 한국인들은 빵을 대신할 아주 흥미로운 음식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바다에서 자라는 해조류인 ‘김’입니다. 바다 위에서 빠르게 자라는 김을 건져 올려 햇빛에 말린 뒤 얇은 판 모양으로 만들었죠.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빵을 곁들여 싸 먹듯이, 한국 분들은 특유의 짭조름하고 바다 향이 나는 이 김에 밥을 싸서 드십니다. 한국 요리를 드셔보셨다면 이 어두운 초록색 김을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또한 바다와 접해 있다 보니 생선과 해산물도 식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한국 음식의 진짜 ‘주민등록증’이라고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 ‘김치’입니다. 김치는 종류가 정말 다양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배추와 채소, 고춧가루, 양념을 넣고 발효시켜 만듭니다. 한국인에게 김치가 없는 식탁은 상상할 수 없죠. 전통 식탁에는 늘 밥과 국, 채소, 다양한 반찬, 그리고 생선이 올라옵니다.
우리 이란 사람들, 특히 이스파한 사람들이 짭짤하고 신맛을 좋아하는 것과 달리, 한국인의 입맛은 매콤하고 달콤한 맛을 선호합니다. 심지어 떡이나 디저트를 만들 때도 밀가루 대신 쌀가루를 사용하죠. 요약하자면, 한국 음식은 우리 이스파한 사람들의 입맛에는 조금 생소할 수 있지만, 바다 음식에 익숙한 이란 북부 출신 분들에게는 제법 잘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에는 고기가 매우 귀한 사치품이었고, 오늘날 한국 마트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식재료도 예전 세대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제적 도약은 아주 흥미로운 문화적 변화도 가져왔습니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인이 지금 뭘 안 먹고 있다면, 다음엔 뭘 먹을지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 드라마를 보신 분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하실 겁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고 있죠. “우리 뭐 먹으러 갈까?”, “뭐 먹을까?” 심지어 심각한 집안싸움을 하는 중에도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다툽니다. 그리고 싸움이 끝나면 또 뭔가를 먹으러 가죠.
물론 이런 음식 사랑이 단순히 배가 고파서만은 아닙니다. 한국 문화에서 식사는 중요한 ‘사회적 활동’입니다.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고, 술 한잔 기울이고, 대접하고, 화해하는 모든 과정이 식탁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한편으로는 옛 세대가 겪었던 전쟁과 가난의 기억이 이러한 음식에 대한 애정과 집착의 뿌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드라마틱한 감성과 기독교의 유입:
제가 보기에 한국인들은 본래 감정이 풍부하고 드라마틱한 분들입니다. 영화에서도 드라마다 높은 흥행을 기록하곤 하죠. 감정 표현이 솔직하고 매우 정열적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바로 기독교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과거 유럽인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은 기독교의 기치 아래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서 부를 가져왔고, 그것으로 유럽 경제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과정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한국 사회는 불교와 유교, 그리고 전통 신앙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기독교의 비중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고 선교사와 기독교 교육 기관들이 빠르게 들어왔습니다. 미국인 목사님들이 학교로 찾아왔고, 개신교 목사님이 담당한 학교의 아이들은 개신교인이 되고, 가톨릭 신부님이 담당한 학교의 아이들은 가톨릭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부모님은 불교신자인데, 아들은 가톨릭신자이고 딸은 개신교인이 되는 가족들이 생겨난 것이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아이들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교회나 성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는 한국 사회 전반으로 깊숙이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대형 교회와 미디어 네트워크, 사회적 프로그램을 갖추며 매우 강력하고 조직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이 점점 비어가고 다른 용도로 변경되거나 매각되는 반면, 한국의 교회들은 성도들로 활기가 넘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모든 한국인이 기독교인이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공식 통계를 보면 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은 종교가 없다고 응답합니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는 약 56%가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답했죠.
한편, 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에서는 신학 공부가 매우 인기 있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목회자의 수가 너무 많아져 국내 시장이 saturation(포화) 상태가 되었고, 많은 목사님들이 해외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의 한인 사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어떤 도시에서는 그리 크지 않은 한인 인구를 위해 여러 개의 개별 교회가 설립되기도 했습니다.
작은 공동체 안에서 여러 교회가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도 유치와 재정적 지원, 영향력을 둘러싼 경쟁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쟁이 때로는 한인 사회 내부에서 갈등이나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죠.
독일 이민의 역사:
한국은 전쟁 직후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의 서독은 ‘한강의 기적’에 비견되는 경제 부흥을 이루며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겪고 있었죠. 이러한 양국의 필요가 맞물려 경제적, 인간적 교류가 시작되었습니다.
1963년 광부 파독 협정이, 1966년에는 간호사 파독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1977년까지 약 8천 명의 광부와 1만 1천 명의 간호사가 독일 땅을 밟았습니다.
어느 한인 어르신이 저에게 당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25명의 한국 청년들과 함께 멋진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하지만 바로 다음 날부터 작업복을 입고 탄광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언어 교육이나 적응 기간도 없이, 첫날부터 하루 12시간씩 고된 노동을 시작했던 것이죠.
남성들은 주로 지하 1킬로미터 깊이의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독일어를 배울 여유도, 독일 사회와 어울릴 환경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50년을 독일에서 사셨음에도 여전히 독일어가 서툰 분들이 많습니다.
10년쯤 지나자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35세 무렵이 되자 고된 노동으로 몸은 지쳤고, 독일의 석탄 산업마저 기울어가면서 광산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습니다. 결국 많은 남성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죠.
하지만 여성들의 삶은 다르게 펼쳐졌습니다. 간호사로 일했던 여성들은 병원과 클리닉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사회와 소통하며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전통적인 남녀 역할이 바뀌기도 하고, 남편들은 헌신적인 아내에게 크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근면한 남성과 여성들이 번 돈의 상당 부분을 한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했다는 점입니다. 이 외화는 각 가정의 생활을 살릴 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가 도약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한 세대의 노을:
독일 한인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 하나는 매년 열리는 축제와 모임입니다.
루르 지역, 특히 도르트문트와 카스트롭라우크셀 주변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한인들의 행사와 축제가 열려왔습니다. 그중 하나가 매년 8월에 열리는 유로파플라츠의 대형 모임입니다.
독일 각지에서 한인 분들이 이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모여듭니다. 멀리서 버스를 타고 와서 텐트를 치고, 함께 한국 음식을 만들고, 공연을 즐기며 며칠 동안 정을 나눕니다.
1세대 어르신들에게 이 축제는 단순한 유흥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친구를 만나고, 고향 음식을 나누고, 모국어를 들으며, 잠시나마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간 듯한 위안을 얻는 귀한 시간이었죠.
하지만 이제 그 첫 세대 어르신들도 조금씩 노쇠해가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세상을 떠나셨고,
어떤 분들은 휠체어에 의지하시며,
또 어떤 분들은 예전만큼 기력을 내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매년 이 뜻깊은 행사를 준비하고 이어가는 일이 조금씩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편집: 오정수
도르트문트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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