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스파한 아저씨의 한국인과 함께한 40년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갑고 고맙습니다.

오늘은 제가 독일에서 지난 40년 동안 한국인들과 아주 가까이 지내며 직접 겪은 이야기들을 들려드리려고 해요.

사실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분들 곁에서 함께하다 보니, 저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이른바 ‘마당발’이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친근한 ‘동네 사람’처럼 되어버렸답니다! (웃음)

 

과거 한국인들이 기억하는 이란의 모습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어르신들, 즉 80대나 90대 되신 한국의 옛세대분들이 기억하는 이란의 이미지예요.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란을 만나게 됩니다.

60년 전만 해도 한국의 구세대는 이란을 아시아에서 아주 강하고 현대적이며 발전된 나라로 기억하고 계셨어요. 걸프 지역의 아랍 국가들이 아직 기틀을 잡지 못했을 때, 이란은 이미 중동 발전의 중심지였죠. 석유가 풍부했고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며 지역 내 위상도 대단했습니다. 당시 이란에서는 ‘아리야’, ‘샤힌’, ‘지앙’, ‘페이칸’ 같은 자동차들을 자체 생산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시절 한국은 독자적인 자동차 산업조차 없었고, 지금의 현대그룹도 당시에는 작은 건설·수리 회사에 불과했답니다! 아시아와 한국의 엔지니어들이 이란의 자동차 공장(이란 나쇼날, 파르스 호드로)을 방문해 생산 라인을 둘러보고 벤치마킹하던 시절이었죠.

 


40년의 삶

 

대한민국의 지리와 식문화의 지혜
남한의 면적은 약 10만 제곱킬로미터 정도로, 이란의 이스파한주(州) 정도의 크기입니다. 폭은 이스파한에서 돌리잔까지, 길이는 이스파한에서 테헤란까지의 거리와 비슷해서 감을 잡기 쉬우실 거예요.

한국은 국토가 좁고 산이 많은 지형이라 넓은 밀밭이나 대규모 목축을 할 수 있는 초지가 부족했습니다. 물론 소, 돼지, 닭을 키우긴 했지만 과거에는 고기, 특히 붉은 살코기가 일상적인 음식이 아닌 아주 특별한 사치품이었죠. 그래서 한국 요리는 우리 이란 음식처럼 고기와 고기 스튜가 가득한 차림과는 조금 다릅니다.

대신 한국에는 아주 큰 축복이 있었어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생선과 다양한 해산물이 항상 식탁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죠. 요즘이야 한국이 워낙 부유해져서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재료는 해외에서 아주 쉽게 수입해 오지만요!

한국의 주식은 1년에 여러 번 수확하는 쌀이었습니다. 밀이 귀했으니 당연히 우리식 빵 문화는 없었죠. 하지만 한국인들은 빵을 대신할 아주 흥미로운 음식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바다에서 자라는 해조류, ‘김’이었어요! 바닷물 위에서 빠르게 자라는 김을 채취해 햇빛에 말린 뒤 얇은 장판처럼 만들어 먹었죠. 이 김으로 만든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여러분도 잘 아시는 ‘김밥’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빵을 찢어 음식을 싸 먹듯, 한국인들도 짭조름하고 바다향 가득한 김에 밥과 재료를 싸서 즐겨 먹습니다. 한국 음식을 드셔보셨다면 이 검붉은 김을 한 번쯤 꼭 보셨을 거예요.

하지만 한국 음식의 진짜 ‘신분증’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김치입니다. 배추와 각종 채소, 고춧가루, 양념을 넣고 발효시켜 만드는데, 한국인에게 김치가 없는 식탁은 상상할 수 없죠. 전통 식탁에는 늘 밥과 국, 생선, 그리고 다양한 반찬과 김치가 올라옵니다.

우리 이란 사람들, 특히 이스파한 사람들이 짠맛과 신맛을 좋아하는 것과 달리, 한국인들의 입맛은 매콤하고 달콤한 맛에 강하게 끌리는 편이에요. 그리고 떡이나 디저트류에는 밀가루 대신
쌀가루를 주로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저희 이스파한 사람들 입맛에는 조금 생소할 수 있지만, 해산물을 즐겨 드시는 이란 북부 길란이나 마잔다란 출신 분들에게는 꽤 잘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기적적인 경제 성장과 달라진 식탁
과거에는 고기가 엄청난 사치품이었지만, 한국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 경제적 도약은 아주 흥미로운 식문화의 변화를 가져왔죠.

한국인들은 돼지 삼겹살을 정말 좋아합니다. 고기를 아주 얇게 슬라이스해서 테이블 한가운데 있는 불판에 즉석으로 구워 먹죠.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양념, 채소와 함께 상추에 싸서 입에 넣는 모습은 아주 정겨운 풍경입니다.

또 한여름 더운 날에는 우리 입장에서 조금 의아한 전통 음식을 즐기기도 해요. 아주 가느다란 국수를 살얼음이 둥둥 뜬 차가운 육수에 말아 먹는 ‘냉면’이라는 음식입니다. 제가 처음 식당에서 냉면을 보았을 때는 ‘아니, 얼음물에 마카로니 면을 넣어주다니!’ 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웃음)

참, 식사할 때 인사도 재밌습니다. 우리는 “맛있게 드세요(Nosh-e Jan)”라고 하지만, 한국인들은 “많이 드세요! 남기지 말고 많이 드세요!” 하고 정을 나누곤 합니다.

언젠가 생선 요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따라갔다가 문화 충격을 받은 적도 있어요. 저는 당연히 따뜻한 첼로카밥 같은 걸 먹는 줄 알았죠! 그런데 수족관 앞에 서서 살아있는 생선을 지목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손질해 횟감으로 접시에 담아주더군요. 그 신선한 생선 살을 매콤한 양념장, 마늘과 함께 상추에 싸서 먹고, 남은 머리와 뼈로는 매운 매운탕을 끓여 먹는 방식이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놀라서 그날은 집에 돌아와 따로 밥을 챙겨 먹었답니다! 😄

한국인의 음식 사랑과 드라마틱한 정서
한국인들과 지내다 보면 음식에 대한 애정이 정말 유별나다는 걸 금방 느끼게 됩니다. 한국에는 *”한국인이 밥을 안 먹고 있다면, 다음에 뭘 먹을지 생각하는 중이다”*라는 유쾌한 농담이 있을 정도니까요.

한국 드라마를 보신 분들은 공감하실 거예요.剧中 인물들은 쉬지 않고 무언가를 먹습니다. “밥 먹으러 갈까?”, “뭐 먹을까?” 하는 대사가 입에 달려있죠. 심지어 심각하게 싸우다가도 상을 차려놓고 밥을 먹으면서 싸우고, 싸움이 끝나면 또 디저트를 챙겨 먹습니다! (웃음)

이건 단순히 배가 고파서라기보다, 한국 문화에서 식사가 중요한 ‘사회적 소통’이기 때문이에요. 이야기 나누기, 손님 대접, 심지어 화해하는 것까지 모두 식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게다가 옛세대분들이 전쟁과 severe한 기근을 직접 겪으셨기에, 음식에 대한 애착이 역사적 아픔과도 맞닿아 있는 셈이죠.

엄격한 예의범절과 존댓말
한국 문화에서 어르신에 대한 경의와 예의는 절대적입니다. 나이가 단 한 살만 많거나 직장 선배여도 함부로 반말을 할 수 없고, 반드시 높임말과 예의 갖춘 어휘를 사용해야 하죠.

식사 자리에서는 가장 어르신이 먼저 수저를 들기 전까지 아무도 먼저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어르신 앞에서 음료나 술을 마실 때는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려 마시는 것이 예의이고, 물건을 건넬 때는 두 손을 쓰거나 오른손을 쓰되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받치는 정성을 보입니다. 여성분들이 어르신께 올리는 인사는 거의 40~45도까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곤 하죠.

만약 여러분이 10명 정도 모인 한국인의 모임이나 파티에 갔다고 해볼게요.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굳이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다니며 일일이 악수하고 인사할 필요가 전혀 없답니다! 그냥 편하게 일어서면서 “저 먼저 가볼게요!” 하고 가볍게 인사한 뒤 나가면 끝이에요. 재미있는 건, 아무도 서운해하거나 “저 사람은 왜 나한테 따로 인사도 안 하고 가지?” 하면서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는 점이죠.

우리 이란 사람들은 보통 누군가 새집으로 이사했을 때 축하의 의미로 꽃이나 달콤한 شیرینی(시리니)를 선물하곤 하죠. 하지만 한국 문화에서는 아주 실용적인 선물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새집에 처음 방문할 때 쌀 몇 킬로그램이나 휴지, 세제를 듬뿍 사 들고 가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풍습이에요!

한국에서 60세, 즉 ‘환갑’을 맞이한다는 건 엄청나게 중요하고 특별한 경사입니다. 예전에는 60세까지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이 마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날은 상 위에 과일과 알록달록한 떡, 온갖 음식들을 탑처럼 높게 쌓아 올립니다. 그리고 온 가족과 친척들이 예쁜 전통 옷(한복)을 맞춰 입고 줄을 서죠. 자식들과 손주들이 어르신 앞에 정성껏 무릎을 꿇고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큰절을 올리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한국에서는 토마토를 과일처럼 다루기도 합니다! 만약 디저트 상 위에 사과와 귤 옆에 빨간 토마토가 함께 예쁘게 깎여 올려져 있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한국인들은 토마토를 채소이면서도 달콤한 과일 간식처럼 즐겨 먹는답니다.

한국의 가정집이나 전통 식당, 혹은 사찰 같은 곳에 들어갈 때는 입구(현관)에서 반드시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신발을 신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집주인에게 아주 큰 실례이자 무례한 행동이에요. 현관에 신발을 그냥 벗어두고 들어가셔도 절대 아무도 가져가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드라마틱한 열정과 문화
제가 느낀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감정적이고 ‘드라마틱’한 에너지를 가진 분들입니다. 여유 시간이 1시간 생기면 차를 마시며 산책하기보다, 차라리 감정이 듬뿍 담긴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한껏 눈물을 흘리는 걸 즐기시곤 해요! (웃음)

이런 성향은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 산업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사랑, 이별, 갈등, 화해 같은 극적인 요소들이 삶과 콘텐츠에 녹아있죠. 드라마 속에서 인물들이 소리를 지르고, 울고, 가출을 했다가 알고 보니 오해였고… 하는 흥미진진한 전개가 스펙터클하게 펼쳐집니다. 하지만 저는 여유가 생기면 그저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는 게 더 체질에 맞더군요.

역사적 아픔과 기독교의 전래
한국인들의 가슴속에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일제강점기의 깊은 역사적 상처와 아픔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식민지 시절의 건물이나 유산을 둘러싸고 보존과 철거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깊게 이루어지기도 했죠.

한편, 한국의 종교사, 특히 기독교의 성장은 매우 독특합니다. 과거 남미나 다른 지역과 달리 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구호 활동, 교육 기관 설립과 함께 기독교가 빠르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재미있는 건, 부모님은 불교 신자인데 아들은 카톨릭, 딸은 개신교 신자가 되고, 나중에는 자녀들이 부모님을 교회로 안내하는 일들이 많았다는 점이에요.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점점 비어가고 있는 반면, 한국의 교회들은 교인들로 가득 차고 봉사와 사회 활동도 매우 활발합니다.

물론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통계처럼 한국인의 56% 정도는 특정 종교가 없다고 응답할 만큼 무교 비율도 높습니다. 하지만 신학 교육이 워낙 인기 있다 보니 목회자 수가 늘어났고, 이에 따라 해외로 이주하는 교민 사회나 목회자분들도 많아졌죠. 독일 내 한국인 사회에서도 여러 교회가 세워지며 교민들의 중심 공동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 이주 역사: 파독 광부와 간호사
독일과 한국의 인연은 1960년대 한국전쟁 이후로 올라갑니다.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한국과 노동력이 부족했던 서독 사이의 협정으로, 1963년부터 파독 광부가, 1966년부터 파독 간호사가 독일 땅을 밟았습니다. 1977년까지 8천여 명의 광부와 1만 1천여 명의 간호사분들이 오셨죠.

한 어르신이 말씀해주시길, 당시에 정장을 차려입고 신사답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렸지만, 바로 다음 날부터 지하 1,000미터 깊이의 탄광에서 하루 12시간씩 힘든 노동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언어 배울 시간도 없이 땀 흘려 일하셨기에, 50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어가 서투른 어르신들이 많으시죠.

이후 탄광 산업이 기울고 계약이 끝났을 때, 많은 광부 어르신들이 독일 간호사분들과 가정을 꾸려 독일에 정착하셨습니다. 아내분들이 병원에서 든든한 가장 역할을 해주셨고, 남편분들은 가정을 돌보며 서로를 지지해주었죠. 그리고 이분들이 고국으로 보낸 송금은 한국 경제 개발의 귀중한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과거 노동자를 보내던 한국이 이제는 베트남 등 세계 각국의 이주 노동자들을 맞이하는 경제 강국이 되었으니, 정말 대단한 변화입니다.

어느덧 다가온 노년과 아름다운 기억들
독일의 루르 지역, 특히 도르트문트나 카스트롭라우셀 주변에서는 매년 8월이 되면 ‘유로파플라츠’ 같은 한국인 교민들의 큰 축제가 열리곤 했습니다.

독일 전역에서 버스를 타고 모여 텐트를 치고, 고향 음식을 나누고, 그리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며 시름을 잊던 정겨운 잔치였죠. 하지만 세월이 흘러 땀 흘리던 청년들은 이제 머리가 하얗게 새고, 지팡이나 व्ही체어(체어)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시면서 행사 규모도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분들이 남긴 헌신과 따뜻한 정은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줍니다.

40년 동안 이 훌륭하고 부지런한 한국인 이웃들과 함께 삶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제 인생의 큰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제 긴 이야기를 경청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편집: 오정수
도르트문트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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